이번 포스트는 서울 강동, 송파 일대의 한성백제 유적지를 수박 겉핥기 하듯이 돌아다닌 내용입니다. 원래 생각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두 곳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었는데 지도를 보니 워낙에 가까운 곳에 관련 유적지가 더 있어서 수박 겉핥기 모드로 인근 고분군 두 곳을 더 돌아보았습니다.
1. 풍납토성(풍납동 토성)
서울 풍납토성은 서울 강동구 풍납동 일대에 자리잡은 초기 백제시대 성곽으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있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토성(土城)입니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이 곳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각종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백제 왕성이라는 설과 단순 방어 시설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섰으나 1997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결과 왕성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우물, 각종 매납 유물, 대형 포장도로 등이 발견되면서 현재는 이 곳이 초기 백제시대 당시의 위례성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 구간은 2.1km 가량이고, 서쪽 성벽의 대부분과 동측 성벽의 일부는 사라진 상태이지만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 유실된 성벽 흔적이 레미콘 공장 터 인근에서 추가로 발견되고 있어 전체적인 외형을 추정할 수 있으며, 전체 성둘레는 약 3.7km에 이르는 꽤 큰 규모의 토성에 해당합니다.
2. 몽촌토성
3.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은 서울 방이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1975년 당시에는 10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도시개발과정에서 4, 5호분이 사라지고 현재는 총 8기의 분묘가 남아있는 고분군입니다.
현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은 1, 3, 4, 5, 6호분으로, 이 중 1, 4(소멸), 6호분은 궁륭식천장의 석실구조를 가진 굴식돌방무덤 확인되었으며, 특히 6호분은 쌍실로 구성되어 있는것이 확인되었습니다. 1
현재 사라진 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 으로 확인되었으며, 가장 늦게 발굴이 이루어진 3호분은 공주 송산리 계열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좁은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달리하는 묘제가 섞여있는 특이한 고분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이 중 1호분은 묘도(널길) 입구를 바깥쪽에 노출시켜 공개하고 있으며, 나머지 봉분은 묘도를 모두 흙으로 덮어 외부로의 노출을 막아놓고 있습니다.
4.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초기 만들어진 돌무지무덤으로 1916년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에서 89기의 고분(흙무덤 23기, 돌무지무덤 66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인근 가락동 일대까지 포함하면 약 300여기의 무덤이 남아있었으나 1970년대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개발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고(가락동 고분군은 전체가 소실) 고분군 서쪽 일부만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돌무지무덤의 대표주자가 고구려인데 이 초기 백제시대에 고구려와 유사한 돌무지무덤 형태가 보이는데, 이는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이 북쪽의 고구려와 어느 정도 닿아있었다는 정황증거로 볼 수 있으며, 이후 자체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합니다.
여담으로 석촌(石村)이라는 지명도 이 곳에 워낙에 많은 돌무지무덤들이 있어서 이곳을 돌마을(돌마리)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1호분은 남북방향으로 늘어선 2개의 돌무지무덤 사이에 흙을 쌓아 연결한 쌍분으로 발굴조사 당시 이미 훼손이 심해 정확한 구조를 알기 어려우나 일단 남쪽은 전형적인 고구려 방식의 돌무지무덤이고, 북쪽은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기상 남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 북분이 만들어진것으로 보이며, 보통 쌍분의 경우 부부를 매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2호분과 4호분이 이 곳에서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 무덤이라 볼 수 있는데 3단의 기단은 고구려와 유사한 석축 돌무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겉면이 돌무지무덤의 형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겉보기에 유사하다고 하여 이 두 무덤이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데요, 2호분은 봉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돌무지를 먼저 쌓고 그 안에 봉토를 채워넣은 반면, 4호분은 흙무덤(분구묘)을 먼저 조성한 뒤 겉에 돌무지를 둘러 무늬만 돌무지무덤의 형태를 만든 것인데 특이하게도 내부에 무덤방이 있어 돌방무덤의 형태와 돌무지무덤의 형태가 혼합된 형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3호분은 밑변이 50미터 내외에 이르는 매우 거대한 정사각형에 가까운 기단부를 가진 계단식 돌무덥으로 과거 이 위에 여러 채의 민가가 있어서 정확한 높이를 알 수는 없으나 최소 4~5m이상의 높이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있는 3단 위쪽으로 최소 2단, 최대 4단 이상이 추가되는 형태를 가지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하단의 기단부 면적만 보면 한 변이 30m인 고구려의 장군총보다 훨씬 더 큰 크기입니다) 3
발굴 조사 결과 4~5세기 무렵의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무덤의 규모로 보아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고이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참고로 이 3호분은 도로건설과정(현재의 백제고분로)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질뻔하였으나(실제로 한성백제시대 옹관과 유골이 훼손) 이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석촌지하보도 건설로 도로설계를 변경하고, 지금의 돌무지무덤들이 보존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5호분은 현재 발굴조사중에 있습니다. 과거 이 곳을 정비하던 당시에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봉토분이어서 따로 발굴조사를 하지 않고 주변조사만 한 뒤 남겨두었던 것인데 일단은 봉분 위에 돌을 덧입힌 후 맨 바깥쪽을 흙을 얇게 쌓아서 마무리하는 방식의 즙석봉토분으로 보고 있으며, 기존 즙석봉토분과 유사하게 내부에 여러 나무널과 독널을 각각 묻은 흙무지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라 기존의 추정이 뒤집힐 수도 있어 발굴 결과가 주목되는 곳입니다. 4
참고로 하나의 무덤 안에 여러개의 독널을 묻는 형태는 영산강 일대의 마한 고분군에서 다수 발견되는 형태로 5호분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마한의 봉토분 형태가 혼합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돌무지무덤은 안쪽에 지름 11.4m의 흙으로 만든 봉분이 있고, 바깥쪽은 한 변의 길이가 16m가량 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5
이게 앞의 2호분이나 4호분처럼 독자적인 백제식 돌무지무덤 변천사의 한 단계인지 아니면 기존의 돌무지무덤 위에 새로운 흙무덤을 쌓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또한 특잏나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내원외방형돌무지 무덤 바로 옆은 현재 발굴조사중인 구역인데 2015년 5월 공원 내에서 뜬금없이 땅이 꺼지는 현상이 나타나서 조사를 해 봤더니 1호분, 내원외방형이 있는 남쪽과 북쪽의 2호분 사이의 공터에서 여러개의 돌무지무덤이 연결된 대규모 연접돌무지무덤이 있는 것이 확인되어 현재 그 발굴조사를 진행중인 구역입니다.
이 곳의 발굴조사 결과 1차 조사에서만 집단 널무덤(목곽묘)이 발견되고 이 곳에서 상당한 유물이 쏟아져나오면서 숨겨졌던 과거의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어느 정도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3호분의 크기를 능가하는 대규모 연접돌무지무덤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1차 발굴조사에서 적어도 30기의 연접돌무지무덤 확인)
움무덤은 별다른 시설 없이 땅을 파서 주검을 안치하는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철기시대부터 상당히 흔하게 조성된 무덤 양식 중 하나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서 놓은 것으로 실제 유구는 해당 지점 바로 아래 땅 속에 보존처리되어 있습니다.
출토층이 돌무지무덤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하여서 시기상 백제가 들어서기 이전의 마한시대 혹은 그 이전 시기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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